1883년(메이지 16년) 4월 상경하여 나카에 조민에게 불어를 배운 뒤 치쿠젠공애공중회와 현양사에 참가했다. 한때 마토노 한스케 등과 함께 오가사와라제도로 건너가 김옥균과 정세를 논했다.
그 뒤 오쿠마 시게노부의 조약개정안에 반대하여 그를 처단할 마음을 품고 현양사를 퇴사했다. 퇴사 이유는 다른 사원들이 공범관계를 의심받고 연대책임을 지게 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역시 현양사 사원이었던 츠키나리 코타로도 계획에 가세했지만, 노모와 처자가 딸린 츠키나리를 속이고 단독 결행했다.
1889년(메이지 22년) 10월 18일 외무성에서 퇴근하던 오쿠마가 탄 마차에 폭렬탄을 던졌다. 마차 안으로 들어간 폭렬탄은 오쿠마의 발 아래에서 폭발했고, 쿠루시마는 그 자리에서 단도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향년 29세.[2] 오쿠마는 목숨은 건졌지만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다.[2] 전부터 협정에 반대하던 각료들은 총리 구로다 기요타카에게 조약개정협상 충단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구로다 내각은 총사퇴하고 조약개정은 좌절되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