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부터 1975년까지 키스는 《Kiss》, 《Hotter Than Hell》, 그리고 《Dressed to Kill》이라는 세 개의 음반을 발매했다.[10] 비록 이 세 음반이 러스트 벨트에 추종자들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그것들은 상업적인 실패였다.[11] 기타리스트 폴 스탠리는 키스가 콘서트에 있을 때보다 스튜디오에 있을 때 키스의 약한 사운드를 낮은 판매량으로 돌렸다. 스탠리에 따르면, "저는 우리의 첫 세 음반 중 어느 것도 이 밴드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강렬함을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를 보러 올 것이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음반을 사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문제가 되었습니다."[12] 키스는 밴드 멤버들이 가부키 스타일의 화장을 하고 불꽃놀이를 하고 가짜 피를 뱉는 정교한 무대 공연으로 유명했다.[11] 베이시스트 진 시몬스는 키스의 악명 때문에, 그들이 키스 이후에 연주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아르젠트, 블랙 사바스, 사보이 브라운과 같은 그룹들과 여러 투어에서 쫓겨났다고 말했다.[13]
키스의 음반사인 카사블랑카 레코드도 비슷한 재정 문제를 안고 있었다. 1974년까지 카사블랑카의 수익이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CEO 닐 보가트는 하룻밤에 평균 1400만 명의 시청자를 기록한 "투나잇 쇼 스타링 조니 카슨"의 오디오 하이라이트 더블 음반을 내기로 결정했다.[14] 카사블랑카는 750,000장을 판매했지만, 그 음반은 엄청난 실패작이었다.[11] 배급업자들은 무료 사본을 우편으로 보냈고, 카사블랑카 공동 설립자인 래리 해리스는 "생기가 없고 메아리치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고 말했다.[11] 이 실패는 키스를 포함한 카사블랑카와의 계약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밴드는 첫 세 음반에 대해 15,000달러의 선금을 받았을 뿐 아직 로열티를 받지 못했다.[11] 계약 위반의 결과로, 키스는 서명할 다른 레이블들을 살펴보기 시작했고, 결국 보가트를 상대로 소송이 제기되었다.[15]
음반사를 구하기 위한 최후의 노력으로, 보가트는 무대 위에서 키스의 악명을 이용하고 이 밴드가 라이브 음반을 녹음하도록 하기로 결정했다. 키스의 매니저 빌 아우코인은 그 밴드가 마침내 그들이 노력했던 사운드를 이룰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 생각에 대해 수용적이었다. 그는 또한 라이브 녹음은 스튜디오 녹음보다 비용이 덜 든다는 사실을 좋아했다.[16] 밴드 멤버들 또한 이 아이디어를 좋아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보가트는 Dressed to Kill Tour를 편곡했다. 그러나 보가트는 이 투어에 자금을 댈 수 없어서 아우코인은 자신의 돈으로 전체 투어 비용을 총 30만 달러로 지불했다.[11]
발매
《Alive!》는 1975년 9월 10일에 발매되었다.[17] 이 포장재에는 게이트폴드 슬리브, 사진이 담긴 투어 프로그램, 그리고 네 명의 밴드 멤버들이 손으로 쓴 메모가 들어 있었다.[10][11] 이 밴드의 첫 번째 투어 중단은 테네시주채터누가에서 열린 발매 날이었다. 발매 5일 후, 아우코인은 보가트에게 키스가 카사블랑카를 떠날 것이라고 알렸다. 이에 대응하여 보가트는 밴드를 유지하기 위해 2백만 달러 수표에 서명했다.[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