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회의 요트 경기는 총 4개의 세부종목으로 이루어졌으며 1912년 7월 19일과 1912년 7월 22일, 이틀에 걸쳐 스웨덴 뉘네스함의 발트해 연안에서 경기가 치러졌다. 남녀 선수가 모두 출전할 수 있는 혼성 종목이었으나 정작 경기에 출전하는 여자 선수가 없어 사실상의 남성 종목이 되었다.
1912년 하계 올림픽 유치 당시 스웨덴 내 어떤 도시에서 요트 종목을 치를 것인가를 놓고 예테보리와 스톡홀름의 두 도시가 경쟁하였다. 예테보리는 감독관의 입국을 위한 이동경로가 972km로 스톡홀름보다 훨씬 유리하다는 점을 내세웠다. 반면 스톡홀름은 올림픽 대회 경기라면 똑같은 도시 주변에서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는 점을 내세웠고 결국 스톡홀름에서 요트 경기가 치러지게 되었다. 정확히는 스톡홀름에서 약 60km 떨어진 항구도시 뉘네스함에서 경기가 열리게 되었다.
대회 조직운영을 위해 스웨덴 왕립 요트 클럽이 조직위로 임명되었다.[1] 경기 시기를 언제로 할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어졌고, 마침내 다른 올림픽 경기 직후에 요트 경기를 치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여기에 올림픽 경주와 연계된 다른 대회들도 함께 개최하기로 결론내렸다.
코스 구역
뉘네스함 연안에 내부코스와 외부코스의 2개 코스가 설정되었으며 그 경로는 다음과 같다.
A코스 - 10m, 12m 경기 / B코스 - 6m, 7m 경기
세부종목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요트 종목의 표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유럽 각국마다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이 다를 뿐만 아니라 선박의 제작규범과 규격이 표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시기 보트 설계와 제작기술에 많은 진전이 이루어지면서, 보트의 형태 (길이, 무게, 항해면적)로 하여금 보트의 속도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표준화된 경기를 마련하기 위한 여러 방안이 제기되었다. 처음에는 각국의 입장차로 표준 정립이 불가능했으며, 요트가 정식 종목으로 도입된 1900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이 수면위로 드러나, 국제 대회에서 요트 대회를 운영하기 위한 범국가적 조치가 절실해졌다.
1906년 표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 회의가 개최되었으며, 마침내 1907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첫 국제 규범이 비준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은 오늘날 국제 요트 연맹 (ISAF)의 전신인 국제 요트 경주 연맹 (IYRU)을 결성하였다.
당시 규범에 따라 미터 (m)단위로 종목을 규정하기로 합의되었으며, 1907년 국제올림픽위원회 측은 1908년 하계 올림픽부터 아래의 선박 규격에 따라 요트 경기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1912년 하계 올림픽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되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