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휘 (趙暉, ? ~ 1273년) 본관은 한양이다.
용진현(龍津縣)에 세거해온 토착사족의 후예로 고려 후기에 동북변에서 군사를 일으켜 원나라에 투항하고 쌍성총관부 총관(摠管)이 되다.
생애
한양 조씨의 시조 첨의중서사 조지수의 아들로 선대부터 용진현(龍津縣)[1]으로 이주하여 대대로 세거한 토착사족이다.[2]
1258년에 몽고의 군사가 화주(和州) 지역을 침략하자, 조휘는 정주(定州) 출신의 탁청(卓靑)과 함께 강원도의 등주(登州), 문주(文州) 등에 있는 여러 성(城)의 사람들을 선동해 몽고군에게 투항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이 죽도로 들어간 후 식량 조달로 수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신집평과 등주부사 박인기(朴仁起), 화주부사 김선보(金宣甫), 경별초(京別抄)[3]의 군사들을 살해하고, 고주(高州)까지 점령했다. 그 후 화주(和州) 이북 지역을 들어 몽고에 바치자 몽고는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조휘를 총관으로 임명하고 탁청을 천호(千戶)로 임명했다.[4]
1259년 등주와 화주의 사람들과 함께 몽고병을 인도하여 한계성(寒溪城, 지금의 인제군(麟蹄)에 있다)을 치려고 했으나 방호별감(防護別監) 안홍민(安洪敏)이 거느리고 나온 야별초(夜別抄)에게 섬멸당했다.[5]
고려의 왕이 몽고군에게 보낸 사자(使者) 김기성 일행과 선물을 보룡역에서 약탈하였으나, 동진국(東眞國)의 군사와 함께 춘주(春州)의 천곡촌(泉谷村)에서 머물다 신의군(神義軍)의 군사들에게 다시 빼앗겼다.[2] 양주(襄州)에서 난민들이 요청하자 군사 400을 내어주어 양주 수령 지주사(知州事)를 잡아가게 하기도 했다.[2]
조휘가 몽고에 투항한 이후 증손 조소생이 1356년에 유인우를 비롯한 고려군에게 쫓겨날 때까지, 4대 99년 동안 쌍성총관부는 조휘 집안의 후손들이 세습하고, 천호 자리도 탁청의 후손들이 세습했다.[6] 조휘의 손녀딸이 이성계의 조부 이춘에게 시집을 가기도 했다.[7]
가족 관계
- 아버지 : 조지수(趙之壽)
- 조휘
- 아들 : 조양기(趙良琪, 1260~?) - 제2대 쌍성총관
- 손자 : 조림(趙琳) - 제3대 쌍성총관
- 증손 : 조소생(趙小生, ?~1362)[8] - 제4대 쌍성총관
- 증손 : 권종(權琮)에게 시집감
- 손자 : 조돈(趙暾, 1307~1380)
- 손자 : 조천주(趙天柱)
- 손녀 : 조씨(도조 이춘의 후궁) - 이성계의 계조모
- 손자 또는 조카손자 : 조숙(趙淑) - 좌윤, 완창대군 이자흥(完昌大君 李子興)의 장인
기타
- 태조실록에 의하면 한양조씨가 본래 고려의 왕족이라 기록되어 있다[9].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