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환범(鄭桓範, 1903년 ~ 1977년7월 14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외교관이다. 스코필드 박사의 부탁으로 3.1 운동 당시 학살 장면을 전세계에 보도하였다.
생애
충청북도 청원 태생으로, 공주의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부탁을 받고 그가 이갑성 등과 함께 촬영한, 일제의 한국인 학살장면을 담은 필름을 갖고 고무신을 신고 걸어서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어서 런던 대학, 제네바 대학, 캠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1940년대 초 중국 상하이로 건너와 호강대학, 성요한대학(聖約翰大學), 진단대학(震旦大学) 등에서 교편을 잡고 충칭에 있었다. 1945년 3월 임시정부는 김규식과 외무부장 조소앙·정환범·임의택(林義澤) 등을 미국샌프란시스코 회의에 파견하려고 국민당 정권의 승인과 군자금까지 결재를 받았으나, 미국의 거부로 무산당하였다.[1] 해방 후, 미군정 때인 1946년 1월 상하이에서 한국으로 귀국하여 정치학과 경제학을 강의한 점을 바탕으로 조국의 경제 재건을 위하여 일하겠다는 포부를 피력하기도 하였다.[2] 정환범은 1946년 7월부터 신한공사 총재를 지냈고,[3] 1946년 10월에는 재일동포 자산반입 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4] 1947년 3월에는 대한육상연맹 회장에 임명되었다.(~1949년 3월)[5] 1948년 2월부터 3월까지 대한체육회장을 맡았다.[6] 1948년 11월 중화민국과의 통상교섭과 중국 내 재산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주중화민국 특사로 임명되어 난징에 주재하였다.[7](~1949년 1월) 이때, 외무부장관 장택상은 그의 선임을 반대하기도 하였다.[8] 1949년 1월, 주일본 대표부 공사에 임명되어 3월 1일에 부임하였다. 그는 부임 즉시 오사카, 나고야, 코베, 후쿠오카 등지에 사무소 설치를 시작하였다. 전임 대사의 경험으로 보아, 재일한국인에 대한 한국대표부의 직접적인 관리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9] 이후, 1950년 1월에 공사직을 사임하였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재산 6~7천만원을 모두 한국의 육영사업에 쓰도록 유언을 남겼다.[10]
각주
↑《대한민국의 기원 : 해방전후 한반도 국제정세와 민족지도자 4인의 정치적 궤적》, 이정식 저. 일조각. 2006년
↑“經濟學을 專攻한 鄭桓範氏卅三年만에 歸國”. 동아일보. 1946년 2월 7일. 三十三년동안 구라파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음양으로 조선해방에 만흔 기여를 하든 鄭桓範 박사가 이지음 그리운 고향에 도라왓다 씨는 충북 淸州 출생으로 열두살 때 고국을 떠나 만주 중국을 거처 구미 각국에서 공부를 하엿는데 론돈대학 주네부대학 켄부리치대학에서 경제학 정치학을 전공하고 몃해전에 중국으로 건너와 滬江대학 성요한대학 震旦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은 일도 잇고 최근은 중경에 잇다가 지난 달 三十일 上海에서 도라온 것이다 저서로는 “무역과 경제계의 장래” “시장 연구” 등을 영문으로 런던에서 발간하여 구리과학계에 큰 이채를 던지엇섯다 씨는 방금 조경무 국장 댁에 유하고 잇는데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하엿슴에도 유창한 우리말로 다음과 같이 감상을 말한다. 나는 오랫동안 외국에만 잇서 조선의 사정을 잘 모르지만 조선을 이저본 일은 업습니다 중국에 잇슬 때에는 정치 경제에 대한 것을 학교에서 강의한 일이 잇고 임시정부와는 즉접 관계는 없었서도 요인들과는 각별한 친분과 연락을 가지고 일해왓습니다 아포로는 조선의 경제 재건을 위하야 미력을 바쳐 건국에 이바지하고저 합니다 )
↑“前 體育會長 鄭桓範옹別世”. 동아일보. 1977년 7월 15일. 대한체육회13대회장을 지냈던 鄭桓範옹(사진)이 14일오후1시 서울대학부속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 향년 74세. 초대주중대사 청주대학총장을 역임한 鄭옹은 48년2월부터 3월까지 대한체육회장직을 맡았었다.
↑“對中通商을 交涉”. 동아일보. 1948년 11월 24일. 大韓民國의 駐中特使로 南京에 赴任하게 될 鄭桓範 博士는 隨員三人을 帶同하고 來二七日 空給로 金浦空港을 出하發리라는 바 鄭特使의 駐中最初任務는 中國과의 通商協定締結의 交涉과 在中國교財産問題를 協議解決하는 데에 있다고 한다.
↑“秘錄 韓國外交<26> : 政府樹立 직후 ⑧ 美中國에 特使館”. 경향신문. 1975년 3월 12일. 그 예로 外務장관(滄浪)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軍政때 新韓公社(舊東拓)총재를 지낸 鄭恒範씨를 駐中특사로, 日帝때 朝鮮은행(현韓銀)간부를 지내 당시 상당한 재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尹致昌씨를 初代駐英공사로 임명했다.
↑김태기, 〈한국정부와 민단의 협력과 갈등관계〉 《아시아태평양지역연구》 Vol.3 No.1 (2000) 전남대학교 아시아태평양지역연구소, 쪽수 불분명. “정환경 대사의 후임으로 정환범 대사가 3월 1일에 부임하였다. 정대사는 부임 즉시 오오사카, 나고야, 코오베, 후쿠오까 등지에 사무소 설치를 시작하였다. 전임 대사의 경험으로 보아, 재일한국인에 대한 한국대표부의 직접적인 관리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13)...13) 김태기, 1997["일본정부의 재일한국인정책."공저 『근 ·현대 한일관계와 재일동포』.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pp. 524-525”
↑“憂國一念…平生을 獨身으로”. 경향신문. 1977년 8월 15일.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그는 변호사에게 맡겨둔 유언장에 6~7천만원의 재산을 모두 한국의 육영사업에 쓰도록 남겼으나 그 자신은 한적한 사찰에 임시로 잠든채 국립묘지에 안장될 절차를 기다리고 있다. 충북 淸原태생인 鄭옹은 公州영명학교를 졸업하던 해 3·1운동을 맞아 이때부터 독립운동에 나선 독립운동가. 13살 소년의 몸으로 스코필드 박사의 부탁을 받고 일제의 한국인 학살장면을 담은 필름을 갖고 고무신을 신고 걸어서 上海로 간 것이 망명의 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