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식(李根植[1], 1959년6월 23일 ~ )은 고교야구시절 안타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으며, 충암고가 사상최초로 전국대회 우승(1977년 봉황대기)하는데 결정적인 주역이었다. 졸업후 한양대를 거쳐 전 KBO 리그OB 베어스의 선수로서 외야수로 활동하였고 1986년을 끝으로 은퇴한 뒤 한동안 현장을 떠났다가 김성근 감독이 1988년9월 10일 3년 계약 형식으로 태평양 감독에 부임하자 타격 보조코치를 맡았는데[2]김성근 감독은 소위 "임호균 각서파동" 때문에 계약기간 1년을 남겨두고 사퇴했다[3].
결국 김성근 감독 후임으로는 박영길 MBC 해설위원이 1990년11월 3일 4년 임기 형식으로 부임했는데[4] 기존 코치진 유임을 밝혔으나[5] 이들은 전임 김성근 감독이 길러놓은 사람들이라 원만한 팀운영이 의문시된다는 지적이 있었으며 김진영 감독이 1989년11월 9일부터[6] 2년 계약 형식을 통해 롯데 감독을 맡으면서 같은 달 30일부터 1년 계약으로 롯데 투수코치를 맡았지만[7]김진영 감독이 1990년 초반 한때 상위권을 질주했음에도 팀 순위 다툼이 치열해지자 당초 구상과는 달리 중반 이후 서서히 등판시키겠다던 박동희를 선발-마무리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투입시켰고 이 때문에 정작 승부처인 후반기 이후부터 힘을 쓰지 못하여[8] 시즌 도중 해임된 데다 같은 해 말 강병철 감독이 재부임하면서 소위 '김진영 라인' 지우기에 따라 퇴출된[9]장명부 투수코치 영입도 구단 측의 반대로 무산됐으며 김진영은 1990년 이후 프로야구계에 돌아오지 못했고 박영길 감독이 태평양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기존 코치들 중 박용진 코치만 퇴진시킨 대신[10]신용균 수석코치 등 기존 인물에 이선덕 전 OB 2군감독, 이홍범 OB 코치, 성기영 전 롯데 감독을 새롭게 보강했다.
게다가, 박영길 감독은 본인(이근식)이 그랬던 것처럼 '김성근 사단'의 일원인 신용균 코치와 불화를 빚어[11] 전체 코칭스태프가 동요했다.
결국 박영길 감독은 계약기간을 3년 남기고 물러났으며 박 감독의 후임으로 정동진 감독이 부임하는 과정에서[12] '김성근 사단'의 또다른 잔류멤버인 신용균최주억이종도박상열김대진 코치와 함께 팀을 떠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