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심덕(尹心悳, 1897년7월 25일~1926년8월 4일)은 일제강점기의 성악가이자 가수 겸 배우이다. 호는 수선(水仙)으로, 일본 도쿄 음악 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돌아와 순회공연에 출연하여 성악가로 명성을 떨치고 토월회 등에서 배우로 활약하였다. 1925년에 대중 가수로 전향하여 《사의 찬미》로 인기를 끌고, 일본에 레코드를 취입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연락선에서 애인 김우진과 함께 대한해협에 투신하여 정사(情死)하였다.[1]
생애
평양에서 4남매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남포로 이주하여 자랐다. 아버지 윤호병과 어머니 김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 신교육을 받도록 했다. 윤심덕은 숭의여학교를, 언니와 여동생은 이화학당을, 남동생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윤심덕의 형제들은 모두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여동생은 피아니스트이고 남동생 윤기성은 바리톤 성악가였다. 1920년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에서 주최한 도쿄 음악학교 동창회의 음악회에서 피아노 듀엣곡의 일종인 네 손을 위한 피아노 작품을 연주했던 윤성덕이 동생이다.
윤심덕도 평양의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처음에는 의사와 교사가 되기 위해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다녔다가, 음악 공부에 뜻을 두었다.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로 건너간 뒤, 아오야마가쿠인을 거쳐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했다. 윤심덕은 도쿄 음악 학교 최초의 조선인 학생이었다.
윤심덕은 활달한 성격이라 도쿄의 남자 유학생들과 잘 어울렸다. 키가 크고 목이 긴 서구형 외모에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2] 1921년에는 유학생들이 계획한 순회공연에 참여했다가 극작가이며 와세다 대학 학생인 김우진을 만나게 되었다. 김우진은 부인과 자녀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1924년에 도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고,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로서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교사로 임용되지 않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혼담이 깨지는 등 개인적인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았다. 부호의 첩이 되었다는 스캔들로 도피까지 한 끝에, 김우진의 권유로 토월회에 들어가 배우로 일하게 되었다.[3] 한국 최초의 대중 가요로 꼽히는 〈사의 찬미〉를 녹음하여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1926년 레코드 취입을 위하여 오사카에 있는 닛토[日東] 레코드 회사에 갔다가[4]사의 찬미를 녹음한 윤심덕은 그해 8월 3일에 김우진과 함께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에 탑승했으며, 4일 새벽 4시 쓰시마섬을 지나던 중 자살하였다.[5] 당시 동아일보는 1926년 8월 5일자 사회면에서 이들의 자살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지난 3일 오후 11시에 하관(시모노세키)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배 이름)이 4일 오전 네 시경에 쓰시마섬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으며 그 선객 명부에는 남자는 전남 목포시 북교동 김우진이요, 여자는 윤심덕이었으며, 유류품으로는 윤심덕의 돈지갑에 현금 일백사십 원과 장식품이 있었고 김우진의 것으로는 현금 이십 원과 금시계가 들어 있었는데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情死-연인끼리의 동반 자살)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라”
이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 감독 김호선은 영화 《사의 찬미》를 제작하였는데, 이 영화는 임성민과 장미희가 주연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