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아버지는 존 멜레 생(John Merle Saint)이고 어머니는 에바 마리(Eva Marie, 성 라이스) 생(Saint)이었다.
그녀는 올버니 근처의 뉴욕 델마에 있는 베들레헴 센트럴 고등학교에 다녔고 1942년에 졸업했다.
그녀는 2006년에 고등학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녀는 볼링 그린 주립 대학교에서 연기를 공부했고, 델타 감마 대학에 들어갔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개인적인 모습의 제작에서 주연을 맡았다.
볼링 그린의 캠퍼스에 있는 한 극장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녀는 연극 명예 친목회인 세타 알파 파이에서 활동했고 1944년 학생회의 기록 보관자로 일했다.
1940년대엔 라디오극과 TV 드라마에 출연했다.
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1953년으로, 그해 NBC에서 방영되기도 한 브로드웨이 연극 "The Trip to Bountiful"에서 대배우 릴리언 기쉬 상대로 나와 호평을 받으며 다수의 상에 후보로 올랐다. 1954년 NBC "Philco TV Playhouse"(1948-1955)의 "Middle of the Night"편으론 에미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TV계의 헬런 헤이즈"라는 칭송을 받으며 일리어 커잰의 영화 <워터프론트>(1954)에 출연하게 됐다. 이 첫 영화 데뷔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으며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일견 연약하고 차분해보이나 내면엔 열정이 고요히 들끓는 비슷한 역할들이 더 들어왔다. 1955년 NBC "Producers' Showcase"(1954-7)에선 폴 뉴먼, 프랭크 시나트러와 손튼 와일더 원작의 "우리 읍내(Our Town)"편에 나와 에멀리 웹(Emily Webb)을 연기했다. <빗물 가득>(1957)으로는 골든 글로브 후보에 올랐고, 남북전쟁 배경의 <레인트리 카운티>(1957)에선 연인 역의 몽고메리 클리프트에게 실연 당한 여성을 설득력 있게 소화해내 찬사를 받았다. <빗물 가득>(1957)을 인상적으로 본 앨프리드 히치콕이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에 발탁했다.
1960년부터는 가정생활에 집중하면서 TV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영화 쪽을 완전히 놓은 건 아니어서 오토 프레밍어의 <영광의 탈출>(1960) 등에 출연하며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2009년 2월 23일 할리우드에 있는 코닥·시어터에서 개최된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 조연상의 프리젠터로서 무대에 등장했다.
2014년 이후로는 배우로는 거의 은퇴했지만[1] 정정한 편인지 2021년에도 팟캐스트에 출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