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이전, 세계은행이 재건과 발전을 위해 제공한 대부금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최초로 세계은행의 대부금을 받은 나라는 프랑스였다. 당시 총재 존 J. 머클로이는 다른 신청 국가였던 폴란드와 칠레를 두고 프랑스를 선택했다. 금액은 요구했던 양의 반인 2억 5천만 달러였으며, 엄격한 조건이 붙었다. 프랑스는 균형잡힌 예산을 갖출 것과, 다른 정부보다 세계은행에 상환 우선권을 부여하는 조건을 수락해야 했다. 세계은행측은 프랑스 정부가 조건에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금의 활용을 엄격하게 감시했다. 추가적으로, 자금을 빌려주기 전에 미국 국무부는 프랑스 정부에 우선 공산당과 관련이 있는 인사들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공산당과의 연합 정부를 해체했다.
1947년마셜 플랜이 효과를 보자 많은 유럽 국가들이 다른 출처를 통해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세계은행은 이러한 경쟁에 맞서서 유럽 이외의 국가들로 눈길을 돌렸다. 1968년까지 세계은행의 대부금은 항만, 고속도로, 발전소 등 대부금을 갚을 수 있는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인프라 건설에 할당됐다.
대한민국은 1955년 58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였으며, 1970년 대표이사국으로 선임되었다.
1968년 ~ 1980년
1968년부터 1980년까지 세계은행은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기본적인 수요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에 중점을 맞추었다. 대출 대상을 인프라에서 사회복지 사업 등으로 확대하면서 대부금의 양은 크게 증가했다.[2] 당시 총재 로버트 맥나마라는 은행 회계 담당자였던 유진 로트버그에게 새로운 수익원을 찾을 것을 요청했고, 로트버그는 사용 가능한 자본을 늘리기 위해 글로벌 채권 시장을 이용했다.[3] 빈곤자 부양 대출의 결과 가운데 하나는 제3세계가 가진 빚의 급격한 증가였다. 1976년부터 1980년까지 개발도상국들의 연평균 부채 증가량은 20%였다.[4][5]
1980년대에 세계은행은 제3세계의 대부금 정리와 개발도상국들의 경제 능률화를 위한 구조 조정 정책에 집중했다. 유니세프는 1980년대 말에 세계경제의 구조 조정 계획들이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수천만 아이들의 건강, 영양, 교육의 질을 낮춘 데 책임이 있다고 발표했다.[6]
1989년 ~ 현재
1989년 초, 세계은행은 다른 조직으로부터의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비판을 불러 일으켰던 과거 개발 정책의 영향을 완화시키기 위해 환경 보호 단체와 비정부기구들에게도 대출을 시작했다.[7] 이후로 세계은행은 개발을 장려하면서도 환경을 보존하기 위한 다양한 추가 정책들을 내놓는다. 일례로 1991년에는 삼림 파괴를 막기 위해 환경을 해치는 상업적 벌목이나 인프라 계획에 자금을 대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오랫동안 세계은행은 비정부기구와 학계로부터 비판을 받아왔다. 전 세계은행 수석경제학자였던 핸리 해즐리트는 세계은행의 통화 제도가 세계적인 인플레이션과, 국제 무역을 국가가 주도하는 세계를 촉진시킬 것이라고 말했다.[14]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전 세계은행 수석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세계은행이 지지하는 소위 자유시장 개혁 정책이 경쟁력 없는 경제에서 너무 빨리, 나쁜 차례대로, 잘못 시행되면 경제 개발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15] 경제학자 장하준은 세계은행을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와 함께 '사악한 삼총사'로 지목하고, 세계은행이 개발도상국들의 경제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16]
세계은행에 대한 강력한 비판 가운데 하나는 세계은행의 관리 방식이다. 세계은행은 188개 나라를 대표하지만, 경제적으로 힘이 센 소수의 나라들이 운영하는 형태이다. 이 나라들은 세계은행의 고위 관리직을 임명하는 방식으로 관점을 지배하고 있다.[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