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은 독립에 대한 열망을 확인한 사건이자 동시에 당대 독립운동가들이 세계의 모든 사상을 탐구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기존의 사상으로는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방법론을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근대 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은 여성운동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과거의 인습인 가부장제와 식민 통치 상황이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1920년대 초에서 중반에 이르기까지 많은 여성 단체가 결성되었다. 일월회나 삼월회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 결성된 여성단체이다.[4]
10월 15일 오전 6시 뎅구산(天狗山)을 진원으로 하는 큰 지진이 발생하여 삿포로에서 오타루까지 많은 집들이 무너지고 각지에서 발생한 화재가 서풍을 타고 번지는 상황
무정부주의자는 불령선인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오타루 재향군인회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동쪽으로 진격하여 폭도들이 시오미다이(潮見台) 고지로 물러나 저항을 계속하자 재향군인단의 추격이 잠시 지연된다.
오타루 고상생도대는 오전 9시 운동장에 집합하여 지대를 편성하고 재향군인단과 협력하여 폭도 섬멸을 시작한다.
이 교안이 알려지자 홋카이도 조선인단체와 노동운동가 출신의 일본 중의원 세카이 가츠오(境一雄)는 학교를 방문하여 항의하였다.[11]
이 사건을 알게 된 도쿄의 독립운동 단체와 무정부주의 단체들은 공동 항의 성명을 일본 정부에 발송하였다. 당시 공동 성명에 참여한 단체는 삼월회 이외에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재동경무산청년동맹, 조선인유학생학우회, 무산학우회, 흑우회, 형설회, 일월회 등이 있었다.[1] 삼월회는 11월 16일 가상적문제규탄 대연설회에 참가하여 박경희(朴慶姬), 정칠성(丁七星) 등이 연사로 연설하였다.
사회주의 표방
1925년 12월 무산계급 남성과 제휴하여 대중본위의 신사회를 건설하여야 계급적, 봉건적, 인습적, 민족적인 다중의 압박을 받는 조선 여성의 해방이 가능하다는 선언을 발표하였다.[1]
1926년 3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기리는 한글 팜플렛을 제작하였고 이춘수가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조선으로 돌아와 각 단체에 배포하였다.[3]
침체
주요 활동가인 황신덕, 이현경, 박순천 등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활동이 침체되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