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소의 궁전은 프란체스코 델 코사, 에르콜레 데 로베르티, 코시모 투라 등이 있었던 페라라 미술 학교의 중심지였다. 보르소 집권 시기에 이 화가들의 가장 중요한 의뢰 사항은 스키파노이아 궁의 프레스코화였다. 또한 그는 피에트로보노 델 키타리노(Pietrobono del Chitarrino), 니콜로 토데스코(Niccolò Todesco), 블라시오 몬톨리노(Blasio Montolino) 같은 다양한 음악가들도 보호했다.
교육 수준이 낮았던 그(그의 형제 레오넬로처럼)는 예술을 그의 정치적 야망을 선전할 프로파간다로서의 실용적인 시야를 지녔었다.[1] 그는 이상적인 통치자로서 자신을 보여주는걸 좋아했고, 그 예로는 스키파노이아 궁의 프레스코화에서 볼 수 있다.[1] 후에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시 《광란의 오를란도》에서 나타난, 관대한 예술 후원가로서의 그의 전통적 모습 역시도 이상화된 표현이다. 반면 문화에 사치스럽게 소비하고 그의 정치적 모습을 선전하였지만, 그는 예술가들에 특별한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에 그들에 대한 후원에는 멀었다. 이 악명높은 자세의 대한 예시로 그는 코사에게 아주 적은 보수를 주었고, 그 결과로 코사는 페라라를 떠나 볼로냐로 떠났다.[2] 그의 개인 성경(1455년에 의뢰된)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채색본 중 가장 뛰어난 것 중 하나이며, 굉장히 비용이 많이 쓰이기도 하였다. 주 채색사인 타데오 크리벨리는 다른 채색본들의 부분을 사용하며 재정적 압박을 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