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이 8년(1779년) 제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아들이 갑자기 죽자 덴메이 1년(1781년) 쇼군의 양자가 되어 이에나리로 개명하였다. 덴메이 7년(1787년) 15세의 나이로 제11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당시의 권신이었던 다누마 오키쓰구를 파면하고 시라카와번의 명군으로 불렸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를 고산케의 추천을 받아 로주 상석으로 임명했다[1].
간세이 개혁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주도한 간세이 개혁은 막부 재정의 재건을 도모하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이었지만, 지나친 엄격함으로 인해 막부내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 존호사건[2][3]을 계기로 쇼군과 사다노부와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결국 간세이 5년(1793년)7월 사다노부를 파면하게 된다.
중진 시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실각 이후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를 노중수좌에 임명하였지만, 분카 14년(1817년) 노중수좌 미즈노 다다아키라[4]가 뇌물 수수를 묵인하고, 쇼군 역시 사치로운 생활을 자제하지 못한 관계로 막부 재정의 파탄 및 정치 기강의 해이가 일어나게 되었다. 다다아키라는 재정 재건을 위해 신화폐 발행, 8회에 이르는 통화 증가를 실행했지만 오히려 물가 상승 등의 부작용을 일으키게 되었다. 1834년 다다아키라가 사망하자 미즈노 다다쿠니가 노중수좌을 계승하였지만, 실권은 이에나리의 측근들이 장악하였다. 정치적인 부패가 심해지자, 각 지방에서는 막부에 대한 불만이 생겨나게 되고 1837년 2월 오사카에서 일어난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을 시작으로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 점점 막부 체제가 붕괴되는 조짐을 보이게 된다. 또한 모리슨호 사건 등이 일어나 해안 방비에 대한 불안도 역시 높아졌던 시기이기도 했다.
↑사다노부의 기용 배경으로는 미성년인 쇼군 대신 차기 쇼군후보로도 생각되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를 내세워서 이에나리의 성장을 기다리기 위한 고산케 측의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1779년에 고모모조노 천황이 아들을 남기지 않은 채로 사망하자, 스케히토의 제6남인 도모히토를 즉위시켜 후대에 고카쿠 천황(光格天皇)이라 불렸다. 아버지인 스케히토 친왕의 궁중에서의 지위가 대신보다도 낮았기 때문에, 태상천황의 존호를 올리려고 했으나 막부의 노중,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등이 반대하여 결국 올리지 못했다. 이를 존호사건이라 한다. 1884년에 메이지 천황이 고조부인 스케히토에게 게이코 천황(慶光天皇)이라는 시호와 ‘태상천황’의 존호를 올렸다. 메이지 시대 이후 태상천황 제도가 폐지되면서 다시 ‘게이코인(慶光院)’으로 칭해졌다.
↑고카쿠 천황이 친아버지에게 태상천황의 존호를 부여하려 하자 막부 측에서 반대한 사건이다. 이것은 쇼군 이에나리가 생부에게 오고쇼(大御所 : 은퇴한 쇼군)의 호칭을 부여하려한 것과 연계되어 쇼군과 사다노부 사이의 대립을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