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살성(道薩城)[1]은 미상으로 분류되어 지리적인 위치의 비정은 충북괴산군도안면니성산성(二城山城)[2]과 충남천안[3]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삼국항쟁의 전적과 지리적으로 불합리하다.
도살성(道薩城)과 관련 전적사료는 이사부(異斯夫) 열전에, 진흥왕 11년(550)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쳐서 빼앗자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진흥왕은 두 나라 병사가 피로에 지친 틈을 타서 이사부에게 병사를 내어 그것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갑사(甲士)가 머무르게 주둔하여 지켰다. 이때 고구려에서 병사를 보내 와서 금현성(金峴城)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사부가 그것을 추격하여 대승하였다.[4]라는 사료에서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과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신라가 공취하여 죽령(竹嶺) 이북과 고현(高峴) 이내 고구려의 강역 10군을 점령할 수 있었다.
진흥왕 12년(551) 봄 3월에, 왕이 순수(循守)하다가 낭성(娘城)에 이르러서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니문(尼文)이 음악을 안다는 것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불렀다. 왕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무르며 그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두 사람이 각각 새로 지은 노래를 연주하였다.[5]라는 사료에서 진흥왕이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을 공취한 지역은 청풍강 유역에 도살성(道薩城)을 점령하면서 낭성(娘城)을 순수하여 하림궁(河臨宮)에서 우륵(于勒)이 새로 지은 청풍체(淸風體) 하림조(河臨調)를 경청하였다.[6]
도살성의 지리적 위치와 명칭의 정립
도살성(道薩城)은 1만 명의 대군의 주둔지, 도살성(道薩城)은 불교(佛敎)에서 득도(得道)의 도(道)와 보살(菩薩)의 살(薩)에서 불교와 관련한 성곽의 명칭으로써 백제의 금현성(金峴城)과 신라진흥왕이 순수한 낭성(娘城) 하림궁(河臨宮)과 연접성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요건을 충족하는 성곽은 충북단양군도락산(道樂山)에 독락성(獨樂城)은 수천명을 수용하는 피난처[7]로 장기간 농성할 수 있으며, 산상봉에 광덕암(廣德庵)이 있다.[8] 또한 불암천(佛巖川)은 단양군 남쪽 20리에 있다.[9]라는 사료에서 불암천은 성곽의 외곽에 지금의 선암계곡으로 변천했다.
권상하(1641~1721)의 기문에, 상선암(上仙巖)에 제(題)하다. 1685년 여름에 독락성(獨樂城) 아래에 이르러 나무꾼에게 물어 본 뒤에 이른바 차일암(遮日巖)이란 곳을 찾았는데, 유심하고 기이하여 참으로 호로병 속의 세계였다.[10]라는 사료에서 지금의 상선암은 독락성의 서벽에 위치한 것으로 고증된다.
독락산성(獨樂山城), 독락성(獨樂城), 도락산성(道樂山城), 도락성(道樂城)은 삼국시대에 쌓아진 것이라고 하며, 그 둘레는 10여 정(町)에 달하고 10만 병사가 머무를 수 있는 큰 성이라 하는데 지금 성안에는 광덕암이 있다.[11]라는 자료에서 장기간 농성(籠城)의 요건을 갖춘 곳으로 불교의 관련 지명과 지리적, 역사적, 음운학적으로 도살성(道薩城)에 부합한다.[12]
신라가 공취한 고구려의 도살성
도살성(道薩城)은 고로봉형산성(栲栳峰形山城)으로 자연성벽을 포함하여 온 둘레는 약 4km 가운데 북쪽에 가산리 방면 계곡에 800m, 동쪽에 광덕사 입구에 600m의 석축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