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보우(寶祐) 원년(1253년), 후사로 들어가 충왕(忠王)에 봉해졌다. 이어 조기(趙禥)로 개명했는데, 조자(趙孜)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는 설도 있다. 경정(景定) 원년(1260년), 태자가 되었고 마침내 경정 5년(1264년), 이종이 죽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주색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고, 조정의 기강이 날로 쇠퇴하였고 변방의 일도 나날이 위급해졌다.
가사도(賈似道)가 몽골을 격퇴하였고 자신을 황제로 세우는데 공로가 있다고 하여 태사(太師)로 임명하였다. 그때부터 가사도가 국정을 장악하였으므로 사실상 가사도의 괴뢰황제였다.
가사도는 교묘한 정치수완을 발휘하고, 공전법 등 농정개혁에 힘쓰는 한편, 인기를 얻는 것도 잊지 않아 그 후 15년에 걸쳐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몽골 제국에서 아리크부케를 쓰러뜨리고 권력을 장악한 쿠빌라이가 다시 남송 침공을 개시하여, 남송이 국력을 총동원하여 국토 방어의 거점으로 삼았던 양양(襄陽)과 번성(樊城)을 1268년부터 1273년까지 5년간에 걸친 포위전 끝에 연이어 함락(양양 공방전)하면서 남송은 더 이상 국면을 돌이킬 힘이 없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