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金管, 일본식 이름: 金澤竹一郞가나자와 다케이치로, 1910년 ~ 1946년)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음악평론가로, 본명은 김복원(金福源)이다.
생애
경기도 개성 출신이다. 송도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니혼 대학에서 수학하여, 지역 명문고와 경성부의 전문학교, 일본 유학을 거치는 당시의 일반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귀국한 뒤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며 잡지 《음악평론》을 발행하는 등 이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카프 계열의 경향파 음악 운동에 동참했으며, 곧 민족음악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1933년 〈외국음악의 소화와 조선음악의 창조〉라는 글을 통해 처음 민족음악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 이후, 서양음악의 완전한 소화와 이를 바탕으로 한 조선음악의 창조를 주장했다. 민족음악 성립을 위한 방법론으로 민요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고, 대중 가요에 대해서는 음악적인 면에서 퇴폐적인 것이 사실이나 대중 생활의 거울이고 정신적인 위무제 역할을 한다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1]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전쟁 시국과 관련된 친일 음악평론을 썼다. 《매일신보》에 발표한 〈동아의 신정세와 음악문화의 재출발〉(1940), 〈국가의 신체제와 신음악의 건설〉(1940), 〈음악획기의 년〉(1940), 〈국민·문화·음악〉(1941) 등이 그 예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서울 명동에서 다방 에리사를 운영했다.[2] '엘리사'로도 불리는 이 다방은 일종의 음악 다방으로, 당시 서울의 문화계 인사들이 모여드는 장소였다.
김관은 1930년부터 1941년까지 왕성하게 발표한 평론글로 음악적 자취는 남겼지만 생몰 연대조차 분명치 않을 만큼 개인사에 대한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03년에 태어나 1950년에 사망했다는 설이 오랫동안 굳어져 있었으나, 신설령은 《중앙신문》 당시 기사와 동향 출신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근거로 1909년 또는 1910년 개성에서 태어나 1945년 말에서 1946년 초 사이에 30대 중반의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3]
참고자료
- 최유준 (2004년 11월 10일). 〈제3장 분단의 음악, 상상하지 못한 음악 공동체 - 1. 굴절의 시대를 살다 간 음악 평론가 김관〉. 《예술 음악과 대중 음악, 그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서》. 서울: 책세상. ISBN 8970134735.
- 신설령 (2004). “김관의 음악비평론”. 《낭만음악》 제17권 (제1호).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