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에 능하였다. 자는 재인(在仁) 또는 사인(仕仁), 호는 지산(芝山),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조선시대의 유학자였던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2대손이다. 전라북도부안군 출신.
이력
관료 생활
조선조 대 유학자 하서 김인후(1510년 ~ 1560년)의 12대손으로 1863년(철종 14)에 고부의 인촌리에서 출생하였다.[2] 아버지 김요협은 가난한 선비인 김명환의 셋째 아들이었으나, 외가인 정씨는 외조부 정계량의 대에까지 전라북도 부안의 대농토를 소유한 부호였다. 무남독녀 장인의 데릴사위 겸 사실상의 양자로 갔던 아버지 김요협이 두 아들에게 유산을 분배할 때 장남인 김기중에게는 1천 석의 농토를, 차남인 김경중에게는 2백석을 물려주었으나 이재에 능한 김경중은 형보다 더 많은 토지를 갖게 되었다 한다.
최종 관직은 가선대부에 이르렀고, 1910년8월한일 합방이 되자 그는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나라가 망하자 이를 절통히 여기고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학교를 설립하였다.[2]
뒤에 역사책을 수집 참고하여 저서인 조선사 17책을 하여 발간하였다.[3] 저서 지산유고와 조선사는 근대 인쇄술에 의해서도 1930년대에 간행된 바 있는데, 해방 뒤 이희승(李喜昇)의 서문과 김화진(金和鎭)의 발(跋)이 붙은 연활자본 4권 1책으로 1966년에 간행되었다. 1924년에는 큰 흉년이 드니 곡물 수천 석을 희사하여 백성을 구제하기도 하였다.[2]1945년4월 27일 서울 성북동에서 세상을 떠났다.[2]
평가
그는 근검절약하여 큰 부를 누렸고, 수백석지기 토지를 물려받아 이를 잘 경영하여 많은 자산을 모았고 방직공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형(김기중)을 부모처럼 섬겼는데 형이 후사가 없자 아들 김성수로 하여금 형의 양자로 보내 후원하였다 한다.
이 교육과 언론 등에서 큰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지산선생의 재력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2] 이재에 능하여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농토는 2백 석이었으나 자신의 소유 토지를 만 석으로 토지를 늘렸다고 한다.
저서
(조선사) 17권
지산유고
가족 관계
장흥고씨(고제방(高濟邦)의 딸)와의 사이에 5남(3명 요절, 성수, 연수) 3녀를 두었다.